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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계절 자고 일어나니 바깥이 너무 환하다. 현관문을 열자 눈 앞은 온통 새하얗다. 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 있는 드넓은 눈밭. 다행히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세상 모든 빛을 머금고, 눈부신 1월의 들판이 나를 기다린다. 눈을 찡그리는데 그 기분이 꽤 괜찮아 잠시 웃어 본다. 차갑고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다. 상쾌함. 찌뿌드드한 몸을 쭈욱 폈다가 숨을 내쉰다. 그윽한 입김. 눈밭에 첫번째 발자국을 남긴다. 포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부츠 모양이 꾸욱 찍힌다. 그대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간다. 아름드리 나무 앞에 도착해 뒤를 돌아본다. 구름이 없는 하늘, 그리고 반짝이는 하얀 빛들의 향연을 만끽해 본다. 겨울의 공기, 그리고 근근히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소리가 전부다. 저 멀리 이웃집에서 연기가..
버스에서 든 생각 앞자리에서 아주머니가 안절부절 하신다. 카드를 찍어야 하는데 아차 싶은 모양이다. 아유 어떡해 가방을 안 가지고 왔어 아유, 기사님 기사님! 나 가방을 안 가지고 왔어. 다급한 목소리로 기사님을 계속 부르신다. 버스 기사님도 난감했는지 "아 근데 어떡하라구요." "나좀, 세워줘요." 좌회전 차선으로 진입하던 버스가 다시 차선을 바꾼다. 정류장에서 얼마 못 가서 아주머니는 내리신다. 문득 든 생각.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갖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우리 어머니 또는 할머니 세대다. 세상을 살아내다 보니 점점 억새지고 세상에 무서울 것도 없고 몸의 감각도 둔해지고, 낯선 물건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못 하고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그런 시기. 왜 먼 앞날을 미리 걱정하는 걸까. 나..
똑같은 꿈을 계속 꾸는 능력 소풍인 것 같다. 어릴 적 자주 갔던 큰솔밭스러운 딴세상 풍경이 어스름히 펼쳐져 있다.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울창한 숲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보물찾기일까? 아니다. 나는 약간의 공포감에 휩싸여있다.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헤매고 헤매다 발길이 멈춰진 두 갈래길가운데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늙고 검은 나무의 형체. 나무는 둘레를 재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굵은 뿌리 사이로 동굴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빨려들 것 같은 음산한 기운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우리는 서로에게 눈짓을 보낸다."들어가 볼까?" 같이 있던 친구들 중 몇명만이 호기심 그득히 굴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생각보다 깊고 긴 굴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한다. 몸이..
학교에서 해본 생각 졸업 후 학교를 찾아갔다. 도대체 이게 몇 년 만인지. 학교는 많은 발전을 했지만 우리들의 스무살은 그대로 간직해 주고 있었다. 학교 이곳 저곳에서 우리 반 사람들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추억들은 우리의 담소 거리가 되었다. 그때의 장면들을 하나 하나 소환 하노라면 코끝이 찡할 정도로 懐かしい하다.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교정을 산책하고 사진을 찍었다. 학교는 너무 아름다웠다. 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왜 그땐 학교가 예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학교는 졸업해야 예쁘다”라고 오늘 친구가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어쩌면, 그때의 생각까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이 많이 흐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겨우 연락처가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톡을 주고받았다. 그동안 아무 일 없었..
달리기 참 신기하지. 어떻게 같은 선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났을 때 저마다 다른 지점에 서 있는지.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만의 지점에서 나름의 페이스 조절을 하고 있다. 나아지거나 뒤쳐진다는 생각 없이 소소하게 행복한 사람들. 오늘의 업무를 완수하고 퇴근 후를 생각하면서 행복해하는 사람들. 노력하지 않지만 불만이 많은 사람들. 우물 안에 갇혀서 자기가 세상 최고라 여기며 사는 캐릭터도 있다. 지금 내 나이와 연차에서 어쩌면 가장 많은 모습들이 보이는 듯하다. 격차의 벌어짐에 가속이 붙는 시점이다. 잘나가는 탑오브더탑 디자이너들의 이야기가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세상에 디자이너는 무수히 많다. 그들 중 매체에 소개되는 디자이너는 몇 퍼센트나 될까.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꿈을 꾸기도..
추억을 현실에 이어 Bon Jovi - It's my life. 드럼을 시작하기에 딱 적당한 노래이자, 나의 첫 완주곡이다. 스네어 한 번만 때려도 엄청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던 그때는 스트레스를 모르고 살았고 아주 건강했다. 전자 드럼에서 처음으로 리얼 드럼을 쳤을 때의 짜릿함. 너무 신나는 나머지 치는 강도를 조절하지 못했고 내 드럼 스틱은 금방 망가지기 일쑤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 사내 밴드는 주 2회 이상 꼭 모였다. 모두가 즐겼던 연습, 그리고 몇 번의 공연. 새로운 경험이 계속되었다. 늘 얌전한 것만 듣던 내가, 음악을 고르는 시야가 넓어졌다. 음악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얻은 것이 최고의 수확이다. 밴드 활동은 내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 동호회가 위기..
좋은 리더 하늘의 별 따기. 옛날 속담인데 너무 잘 만든 것 같다. 요즘 같은 때 쓰라고 나왔나 보다. 좋은 리더를 만나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 힘든 일이라니. 인간에게 아무리 바이오 리듬이 있다지만 요즘만큼 감정선이 극과 극을 치달았던 일이 있었던가?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날 때가 있다. 리더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를 따라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할까.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은 리더를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기분파, 정치가, 가식형 등 여러 타입을 만나 보았다. 그러나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리더란, ‘디자인을 못하는 리더’라 생각한다. 리더의 디자인은 리스펙 할 수 있어야 한다. 본보기가 되는 디자인에서 인사이트를 얻고 리더의 의견에 ..
판소리 공연 '오셀로'를 보다 덕수궁 돌담길을 몇 년 만에 걷는지. 공연 시간이 가까워져 사촌동생과 나는 밥 대신 간단하게 와플과 커피를 사서 정동극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판소리 공연은 난생처음이다. 기대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그동안 접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설렜다. 제목은 판소리 오셀로. 오셀로 이야기를 판소리로 풀어나가는 것이라 한다. 상상할 수가 없네. 판소리 무대라 함은 무엇인가. 스탠드 마이크가 하나 있고 옆에는 북 치는 그분의 이름이 뭐더라, 고수라고 한다. 고수의 북 장단과 추임새에 맞춰 소리꾼이 부채를 접었다 펼쳤다 하면서 노래와 말을 하는 모습이 아니던가. 그런데 공연장으로 입장하는 순간 아, 나는 정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이 공연을 보러 온 것..